국립극단 2026 시즌 라인업 공개

국립극단 2026 시즌 라인업 | 국립극단 제공

국립극단(단장 겸 예술감독 박정희)은 2026년 새해를 여는 작품 라인업을 발표한다. 7편의 자체 제작 공연을 비롯해 공동기획, 기획초청 등 시대를 담은 연극들이 다채로운 형식과 이야기로 관객의 곁에 함께 한다. “아시아 연극의 게이트”를 천명하며 올해 첫발을 뗀 국립극단과 우리 연극의 해외 진출 시도도 돋보인다. 국립극단의 제작 연극 2편이 싱가포르, 홍콩 등 해외 연극제에 초청받는 성과로 국경을 넘어 세계 관객들을 만날 예정이다.

국립극단은 올해부터 2027년까지 3개년간 “현존과 좌표”라는 표제 아래 무대의 심부를 연극의 본연이자 존재의 재현이라는 ‘인간’에 집중한다. 표제 “현존과 좌표”는 연극은 인간 삶에 대한 서사와 실존의 표상이라는 화두로 인간으로서의 연극과, 또 연극으로서의 인간이라는 상호 관계성을 좌표계에 빗대어 명명됐다.

특히 2026년은 “불완전함의 역설”을 제재로 결점의 인간, 불완전성 속에서 비로소 꽃 피우는 삶의 드라마를 무대 위에 그려낸다. 4차 산업혁명이 몰고 온 AI시대에 불완전성이야말로 인간을 인간답게 하는 근원적 힘이자, 실존은 결함을 전제로 태어난다는 섭리를 담은 공연들이 대항의 반기를 든다. 인간만이 감지할 수 있는 제3의 무언가, 그 행간의 여백을 들여다보는 작품들로 꾸린 국립극단 2026 시즌 라인업은 설명할 수 없는 것들로 가득한 인간의 삶이 곧 살아있음을 대변하고 존재한다는 것의 정의임을 보여준다.

반야 아재

국립극단은 세기를 넘어온 고전, 러시아 문학 황금시대의 마지막을 장식한 ‘황혼의 작가’ 안톤 체호프의 전설적인 희곡 『바냐 아저씨』에 한국적 변주를 더한 <반야 아재>(작 안톤 체호프, 번안·연출 조광화)를 무대에 올린다.

국립극단은 기술의 발전 속도가 사상적 빈곤을 동반하는 오늘날, 시공간을 초월해 온 고전의 영속적인 힘에서 시대의 답을 찾고자 한다. 특히 혼란한 시대 속에 삶의 부조리와 인간 운명을 애잔하면서도 한편으로는 경쾌한 희극성으로 담아낸 『바냐 아저씨』를 새해의 고전으로 택한 데에는, 세기를 건너 21세기 인류의 단절과 고독을 비춰내는 19세기 작가 체호프에 특유의 극작술에 있다.

체호프는 평범한 사람들의 일상을 사실적으로 묘사하면서 자살이나 결투 등 가장 강력한 연극적 효과는 오히려 무대 뒤에 숨기거나, 갈등과 폭발을 의도적으로 물밑 흐름 속에 감추는 독특한 작품관의 소유자다. 『바냐 아저씨』는 이러한 체호프 희곡의 특징 위에 등장하는 모든 인물이 각자 자신의 전기(傳記)를 내포하여 일상의 드라마 속 ‘인간의 복합성’을 탁월하게 그려낸 작품이다.

한적한 시골 영지, 죽은 누이의 딸 ‘소냐’와 노모를 모시고 살아가는 ‘바냐’. 그를 방문한 매부 ‘세레브랴코프’ 교수와 새 아내 ‘엘레나’가 ‘바냐’가 돌보던 영지 매각을 선언하면서 한바탕 소동이 일어난다. 등장인물들은 각자의 문제로 고심하고 서로의 감정이 엇갈려 아파한다. 절망 위에 선 ‘바냐’는 총을 겨누지만 결국 아무것도 변하지 않는다. 남겨진 이들은 다시 각자의 자리에서 묵묵히 삶을 이어가야 한다는 냉혹한 진실을 마주한다.

『바냐 아저씨』는 현실에 적응하는 인물과 과거 또는 미래를 꿈꾸는 인물들을 교차로 등장시키고, 일상의 비극과 희망 사이를 방황하는 주인공들의 모습을 미화하거나 비난하지도 않는다. 등장인물이 주변인물들과 나누는 대화의 대사 외에도 불특정 다수에게 발화하거나 스스로 말하는 독백의 구성도 두드러지는데, 이러한 작품의 전개는 범인(凡人)으로서 포괄성과 동시에 개인의 영원한 고독, 서로에 대한 이해 불능을 표상한다.

인간의 상실감을 망라하는 작품에서 삶의 의지를 당부하는 아이러니가 작품이 가진 핵심적 뼈대다. 극의 정점에서 “어떡하겠어요. 살아야죠! 우리 살도록 해요. 길고도 숱한 낮과 기나긴 밤들을 살아 나가요. 운명이 우리에게 보내주는 시련을 참을성 있게 견디도록 해요.”라고 말하는 소냐의 대사는, 잔혹한 여정으로서 우리의 삶을 인정하면서도 견디고 버텨서 ‘살아 나가야 하는 것’이 삶의 본질, 인생의 원동력이라는 단순하고 겸허한 진실을 전한다. 주변 사람, 주변 세계와의 교류를 자신이 가진 마음속의 프리즘만을 통해서 바라보는 무수한 개인들이 서로에게 겪는 몰이해와 삶의 허무감이 숱한 이탈자를 만드는 현대사회에 『바냐 아저씨』가 적중하는 이유다.

국립극단과 명동예술극장은 앞서 세 번의 다른 『바냐 아저씨』 프로덕션을 진행한 바 있다. 1986년 국립극단 무대에 처음 오른 <봐냐 아저씨>(연출 장민호)는 영원한 연극배우, 한국 연극의 분신 장민호의 연출 데뷔작이었다. 2004년에는 안톤 체호프 서거 100주기를 맞아 기념공연으로 국립극단 무대에 선보이기도 했다. 당시 백성희, 오영수, 이승옥, 문영수, 최상철, 이문수 등 걸출한 배우들이 <바냐아저씨>(연출 전훈)의 막을 함께 올렸다. 2013년에는 이성열 연출과 이상직 주연으로 명동예술극장에서 관객을 만난 <바냐 아저씨>(연출 이성열)가 변치 않는 고전 명작의 힘을 보여줬다.

국립극단 『바냐 아저씨』의 네 번째 선수기를 올리는 조광화 연출은 <반야 아재>라는 번안으로 원작의 배경을 한국으로 옮겨온다. 내년이면 데뷔 35년 차를 맞는 조광화 연출은 흠결 없는 작품 해석과 감각적인 미장센, 밀도 높은 서사로 <남자충동>, <미친키스>, <됴화말발>, <파우스트 엔딩> 등 숱한 흥행작을 만들어 온 대한민국의 스타 연출가이자 극작가이다.

조광화 연출은 원작에 혼란스러운 시대상과 현대적 감각을 더해 스러지는 인간의 욕망과 허상을 표상하는 동시에 내밀한 인간관계에 질량을 더하고 삶의 페이소스를 드리운다. <반야 아재>는 분열과 고독의 한국 사회에 그로테스크함을 간직하였으나 희망을 이야기하는 보드빌로, 관객에게 익숙하지만 새로운 울림을 전할 예정이다.

안트로 폴리스 Ⅲ, Ⅳ, Ⅴ

테베의 핏빛 신화, 인류사 비극의 성찬― 국립극단은 2026년 [안트로폴리스] 대장정의 종착지에 다다른다. 2023년 함부르크 도이체스 샤우스필하우스에서 초연(연출 카린 바이어)한 뒤 강렬하고 야성적인 무대로 세계 연극계의 시선을 단숨에 사로잡은 <안트로폴리스 5부작>이 새해 국립극단 무대의 막후에 들어선다.

유럽사에 근간 중 하나인 고대 그리스 신화의 비극을 탐구한 작품은 권력과 폭력, 가족사의 비극, 도덕적 딜레마 등을 광기와 광란의 신화 원전에 버무려 낸다. 인간 본능의 잠재된 야수성이 날 것으로 드러나고 이성과 윤리에 본성과 생리가 충돌하는 폭발적인 무대는 한시도 눈을 뗄 수 없는 충격과 경외의 전율을 선사한다.

실제로 [안트로폴리스]는 초연한 이듬해 독일의 ‘올해의 극장상’, ‘올해의 연극상’, ‘올해의 작품상’ 등을 석권하며 그 작품성과 인기를 입증했다. 작품은 안정적이고 유연한 제작 시스템과 극장 운영으로도 유럽 전역을 넘어 세계 무대의 주목을 받았다. 2023년 초연에 이어 2024년, 2025년 올해도 [안트로폴리스]의 연작 상연을 이어오고 있는 도이체스 샤우스필하우스는 5부작을 3일에 걸쳐 10시간 이상 몰아보기 하는 마라톤 공연을 매 시즌 지속해 오면서 극 예술의 근간인 유럽 연극의 저력을 보여줬다.

국립극단은 올해 <안트로폴리스 5부작> 중 1부작 <프롤로그/디오니소스>(연출 윤한솔)와 2부작 <라이오스>(연출 김수정)를 국내 무대에 처음으로 소개하면서 큰 반향을 불러왔다. 인류 문명이 초래한 비극의 대물림 서사를 오늘날 한국 사회에 정치, 기득권 풍자와 기술 우선주의의 비판을 곁들여 동시대적 의미를 함양한 연극으로 평가받았다. 특히 고대와 현대의 시간을 넘나드는 극적 장치들로 살육으로 세운 건국의 비극이 산업혁명과 신자유주의로 완성해 낸 오늘날의 도시에도 여전히 순환되고 반복 작동하는 ‘비극의 전승’을 보여줬다.

2026년 새해에는 3~5부작 <오이디푸스>, <이오카스테>, <안티고네/에필로그>가 순차적으로 무대에 올라 인간이 건설한 도시의 처참한 잔향을 펼쳐놓는다. 신화의 원형적 서사가 품은 보편적 경험이 인류에게 실존적 화두를 던지고 현대사회에 비극의 전조를 피할 수 없이 관철하게 한다. 운명에 순응하거나 숙명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질문하여 문명을 이룩한 인간’이 겪는 자아인식의 파괴와 도시의 집단적 무의식, 고통을 동반하는 자각의 목소리가 무대에 울려 퍼진다.

가장 먼저 막 올리는 3부작 <오이디푸스>(작 소포클레스·롤란트 쉼멜페니히, 연출 강량원)는 [안트로폴리스]가 담고 있는 신화 중 가장 많이 무대화된 작품이다. <오이디푸스>는 5부작 중에서도 핵심의 중추, 허리의 역할을 담당한다. 시리즈 전반부가 보여주는 ‘도시의 기원’과 ‘권력의 비극’을 이어받아 본격적으로 인간 존재의 인식 구조를 탐구하는 작품은 ‘인간과 인간’ 또는 ‘인간과 국가’ 간에 가치 갈등과 전쟁, 폭력으로 얼룩지는 후반부 연작들을 견인한다.

‘오이디푸스’는 아버지를 죽이고 어머니와 결혼한다는 예언을 실현한다. 전염병이 도시를 휩쓸고 신탁에 따라 진실을 찾는 ‘오이디푸스’의 칼날은 자신을 향한다. 깨달음이 곧 파멸임을 말하는 작품은 오늘날 우리 인류의 근원적인 질문으로서 자신을 규정하는 것, 자아 정체성의 뼈아픈 사실을 공명한다.

<오이디푸스>의 연출은 신체적 연기술로 인간을 잇는 언어를 무대 위에 그려내는 강량원이 맡는다. 한국 연극의 형식적 실험과 표현의 확장을 이끌어 온 관록의 연출은 다수의 무대화로 다소 익숙하고 평면적인 <오이디푸스>의 서사를 감각적인 연출법으로 낯설고 색다르게 관객 앞에 풀어놓는다.

권력을 향한 살인적인 동족상잔의 이야기는 지금 우리 세계 도처에서 벌어지는 전쟁의 비극을 암시하기도 한다. 4부작 <이오카스테>(작 롤란트 쉼멜페니히·아이스킬로스·에우리피데스, 연출 서지혜)에서 ‘오이디푸스’의 아들 ‘에테오클레스’와 ‘폴리네이케스’ 두 형제의 왕위 다툼은 도시 전쟁의 위기로 번진다. 어머니 ‘이오카스테’는 중재와 설득에 나서지만 그녀의 외교론은 쉽게 화해를 부르지 못한다.

[안트로폴리스]의 작가 롤란트 쉼멜페니히에게 <이오카스테>는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등 오늘날 세계 분열이 가장 깊게 영향을 미친 작품이다. 작품은 광적인 욕망과 집착 앞에 인간의 이성과 자유의지의 구원이 과연 가능한지를 묻는다.

<이오카스테>가 보여주는 인류의 자기파괴적 칼날을 서지혜 연출이 지휘한다. 인물이 가진 입체적 면모를 배우의 자질로 탁월하게 발현시키는 서지혜 연출은, 극의 모든 장면을 이끌어 갈 ‘이오카스테’를 필두로 인류사 비극의 최전방에 선 배우들의 혼신에 강림하여 인간이 겪는 실의와 좌절을 처절하게 그려낼 예정이다.

<안티고네/에필로그>(작 소포클레스·롤란트 쉼멜페니히, 연출 정영두)에 이르러 그 비극적 계보가 도시의 침묵과 몰락으로 종결된다. ‘안티고네’는 신과 인간의 법 사이에 홀로 서는 인물로 사랑과 죽음이 교차하는 도시의 운명을 완성한다. 국가의 명령을 어기고 죽은 형제 ‘폴리네이케스’의 장례를 치르는 ‘안티고네’의 결단은 가족애를 넘어 국가와 권력, 윤리와 신념의 관계를 근원적으로 되묻는다.

개인의 윤리와 도덕적 양심, 그리고 도시의 법과 규율을 충돌시키면서 인간 의지와 능동적 자유에 질서의 폭력성을 가하는 ‘안티고네’의 이야기는 ‘에필로그’로 이어진다. 권력의 종말과 인간의 한계를 총체하면서 인류의 오만과 죄의 대가를 냉정한 시선으로 응시하는 작품은 극장을 넘어 비극의 숙명적 굴레를 짊어진 현대사회에도 서늘한 시선을 드리우며 막을 내린다.

정영두 연출이 [안트로폴리스]의 마지막 장막의 베일을 무대에 벗어낸다. 대국의 사회 속에서 개인이 가지는 내면의 감정과 욕망을 섬세하면서도 웅장하게 그려내는 연출로, 장르의 경계를 넘나드는 예술가 정영두의 <안티고네/에필로그>가 파괴와 폭력으로 얼룩진 현대사회에 저항의 단말마를 예고하고 있다.

역행기

현존하는 국내 희곡 공모 중 최대 규모를 자랑하는 국립극단 창작희곡공모가 내년 첫 무대화로 결실을 거둔다. 국립극단은 한국 연극의 정체성을 잇는 수작을 발굴하고 한국 극작가 등용문으로서 전통을 부활하고자 지난해 15년 만에 현상 창작희곡공모를 재개했다. 당시 303대 1의 경쟁률을 뚫고 대상을 수상한 김주희 극작의 <역행기>가 한국 연극의 성지, 명동예술극장에 오른다.

<역행기>(작 김주희, 연출 신재훈)는 수상 당시 “이야기가 요구하는 상상적 공간의 스케일, 그리고 이야기를 추동하는 주제의 다층성을 감안할 때 대작이라 부를 작품이다”라는 평가를 받으며 심사위원회의 만장일치로 대상의 영예를 안았다. 국립극단은 지금, 여기 우리의 삶을 대변하는 창작극의 동시대적 의미와 한국 연극의 예술적 소산을 극장에 새기고자 1년간의 작품개발 과정을 거쳐 <역행기>의 무대화를 결정했다.

신화적 외연을 부연한 지하세계를 극적 배경으로 차용한 <역행기>는 인간 심연의 가장 깊은 곳을 들여다보는 동시에, 그 심연의 세계를 박차고 뛰어오르는 생명력으로 가득 찬 작품이다. 팔 년째 집 밖으로 나가지 않던 잉여인간 ‘인안나’가 삶을 끝내기로 마음먹었을 때 바닥이 붕괴된다. 몸에 방바닥 조각이 달라붙은 채 지하세계를 역행하게 된 ‘인안나’가 마주한 폐허의 바닥에는 급속도로 성장한 한국사회가 무심하게 지나쳐 온 얼굴들이 있다.

<역행기>는 수 세대 동안 바닥에 묻어 두었던 여성들의 이야기를 모계적 가보로 이어내어 지상으로 끌어올리는 진보적 구성을 보여주지만, 투쟁과 다툼을 택하는 대신 연대와 재건의 강한 의지를 품은 작품이다. 치유의 동력으로 상처를 끌어안을 것을 말하는 작품의 따뜻한 역설은 창작극이 가지는 예술적 의무로서 관객의 손을 오늘 우리가 서 있는 곳, 그리고 걸어 나갈 미래로 이끈다.

<역행기>는 무한한 연극적 상상력과 과감한 시대성의 반영으로 특출난 신재훈 연출의 손에서 무대의 생명력을 부여받는다. 작품은 희곡의 문학성이 두드러지는 ‘레제 드라마(lese drama)’의 형식을 취하고 있는 만큼, 현대의 창작극들이 예술적 역량을 발휘해 온 도전적이고 전위적인 무대 구성의 계보를 이어갈 예정이다.

삼매경, 그의 어머니

국립극단은 2026년을 새로운 레퍼토리의 발굴 가능성과 정착의 기회를 탐색하는 원년으로 삼는다. 레퍼토리 대신 레퍼토리 후보작들을 라인업에 전격 배치해 제작 연극의 작품 완성도를 높이고 무대의 지속성과 흥행성을 판단한다. 레퍼토리 확보를 통해 한국 연극을 대표할 공연의 확장성과 제작 시스템의 안정화를 도모한다는 목표다.

국립극단은 레퍼토리 확대라는 숙원을 이루기 위해 지속적으로 ‘Pick 시리즈’ 등의 기획사업을 도입해 왔다. 관객과 제작자의 관점에서 초연 이후 재상연이 기대되는 국립극단의 제작 연극들을 추린 다음, 그 작품의 세계를 단절 없이 다시 무대 위에 올린다는 취지다. 단순히 재연에 그치지 않고 작품의 철학적 주제와 예술적 형식을 관객의 감각 속에서 다시 확인하여, 시대의 정서와 무대의 호흡을 불어넣는 방식으로 레퍼토리 창작은 여전히 유효한 힘을 갖는다.

국립극단이 레퍼토리 검증에 나서는 첫 공연은 <삼매경>(원작 함세덕, 재창작·연출 이철희)이다. <삼매경>은 한국 낭만주의 희곡을 수사하는 함세덕 작가의 『동승』을 연출가 이철희가 재창작하여 올해 국립극단 무대에서 초연했다. 한국 연극사에 전설적인 고전으로 기록된 작품에 현대적 감각을 가미해 소생하는 동시에, 과거 <동승>(1991, 박원근 연출)으로 연극계의 일약 스타덤에 올랐던 지춘성 배우가 주역으로 나서며 혼신을 다한 연기로 연일 관객과 평단의 호평이 쏟아졌다.

작품은 연극적 상황에 극단적으로 몰입하는 배우의 의식과 비로소 황홀한 경지에 이르는 물아일체의 여정적 서사 구조를 앞세워, 관객에게 고뇌하는 인간으로서 스스로를 구원하고자 하는 의지를 묻는다. 과거 자신의 역할을 실패라고 여기며 연극의 시공간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는 배우는 결국 오른 저승길에서 삼도천으로 뛰어들어 과거와 현재, 연극과 현실이 혼재된 기묘한 ‘삼매경’을 경험한다.

연출가 이철희는 한국 근현대사의 휘모는 태동력을 무대에 풀어놓는 진가를 보여주면서도, “고전에 대한 저항”을 사조로 원작 『동승』의 심상을 새롭게 표현하고, 분절하거나 파열하기도 하면서 시대의 연극예술을 그려냈다. 특히 깨달음이 단번에 도달할 수 있는 경지가 아니라 수많은 반복과 흔들림, 머무름과 방황 속에서 다가서는 과정이라는 작품의 메시지는 관객의 마음속에 깊은 사유의 흔적을 남겼다.

새해 새롭게 만나는 <삼매경>은 정적인 미학 속에 진정성과 감정의 진폭을 만들어 내는 극의 흐름은 그대로 유지하되 무대의 구성과 리듬, 조명과 음향, 배우의 움직임을 더욱 정교하게 가다듬는다. 절제된 움직임과 시적 언어, 반복과 변주의 구조 속에서 마치 명상에 드는 것처럼 관객이 작품의 호흡에 완전히 동화될 수 있도록 완성도를 높이는 데에 공을 들일 계획이다.

헤다 가블러, 십이야

국립극단이 세계에서도 인정받는 한국 연극의 세계화를 위해 총력을 기울인다. 국내 최대 연극 제작단체로서 국립극단은 전략적이고 체계적인 국제 교류 방안을 구축하고 해외 진출의 활로를 모색해, 우리 연극의 세계로의 항해에 닻을 올린다.

국립극단은 그 출발점으로 아시아에 전초기지를 둔다. ‘아시아 연극 게이트’로서 우리 연극뿐만 아니라 아시아 연극의 해외 진출에 길목과 거점을 대한민국 국립극단으로 옮겨온다는 계획이다. 특히 유럽의 장기불황과 경제몰락으로 세계 무대의 시선이 대안의 대륙 예술로 향하는 세태에, 국립극단은 아시아 연극의 대표주자로 자리 잡아 공연예술의 원전인 유럽과 북미까지 단계적으로 진출 범위를 넓힌다는 계획이다.

국립극단은 올 한 해 동안 세계 공연 및 아시아 유수의 연극제 인사들을 직접 명동예술극장 무대로 초청하여 제작 연극을 선보여 왔다. 각국의 주재 문화원 등을 경유하는 꾸준하고 지속적인 소통의 결실로 지난 10월에는 <십이야 Twelfth Night>가 중국 베이징에서 양일간 공연의 전석 매진을 기록하며 관객들의 큰 호응을 받기도 했다.

2026년에는 국립극단 <헤다 가블러 Hedda Gabler>와 <십이야 Twelfth Night> 두 작품의 해외투어가 예정되어 있다. 가장 먼저 국경을 넘는 작품은 <헤다 가블러 Hedda Gabler>(작 헨리크 입센, 연출 박정희)다. 싱가포르 국제 예술 축제(Singapore International Festival of Arts, 이하 SIFA)의 초청으로 내년 5월 싱가포르 드라마센터(Drama Centre)에서 관객을 만난다. 2012년 초연한 후 13년 만에 박정희 연출, 이혜영 주연으로 올해 국립극단 무대에 다시 오른 <헤다 가블러 Hedda Gabler>는 티켓오픈 일주일 만에 전석 매진의 기염을 토하며 그 작품성과 흥행을 다시 한번 입증했다. SIFA의 예술감독 총쯔치엔(CHONG Tze Chien)은 당시 <헤다 가블러 Hedda Gabler> 한국 공연을 직접 관람한 후 그 자리에서 예술제 초청을 결정했다.

<십이야 Twelfth Night>(원작 윌리엄 셰익스피어, 각색·연출 임도완)는 새해 홍콩 공연으로 다시 한번 언어적 장벽을 뛰어넘어 전 인류가 공감할 수 있는 연극임을 증명한다. <십이야 Twelfth Night>는 프로덕션 단계부터 해외 진출을 염두하고 국립극단이 기획·제작한 작품으로, 윌리엄 셰익스피어가 극작한 서사의 보편성에 문화적 가변성을 더했다. 익숙한 드라마에 한국적 변주로 무대미술, 안무, 음악, 의상 등에 전통적 미학을 가미해 한류의 바람을 타고 세계 관객들의 마음에 닿을 수 있는 얼개다. 홍콩 국제 셰익스피어페스티벌(Hong Kong International Shakespeare Festival, HKISF)의 초청으로 2026년 6월 서구룡문화지구에 위치한 프리스페이스 더 박스 극장(The Box, Freespace)에서 막 올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