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국립어린이청소년극단(단장 겸 예술감독 박정희)이 출범 이후 첫 작품으로 <영지>(작 허선혜, 연출 김미란)를 선보인다. <영지>는 어른들이 만들어 놓은 기준을 따르기보다 ‘나다움’을 지키고자 하는 11살 영지와 친구들을 통해 자신만의 목소리를 찾아가는 과정을 그린 작품이다.
<영지>는 2018년 국립극단 어린이청소년극연구소 ‘예술가청소년창작벨트’를 통해 <병목안>이라는 제목으로 발굴되었다. 이후 개발 과정을 거쳐 인물 중심의 서사로 확장, 2019년 국립극단 청소년극 ‘12살 프로젝트’의 첫 번째 작품으로 <영지>라는 제목으로 초연되었다. 2020년과 2023년 앙코르 공연을 통해 꾸준히 관객을 만나왔으며, 2023년 접근성 버전, 2024년 국립극단 온라인 극장 베리어프리 수어 버전을 통해 포용적 예술의 가능성을 확인했다.
그 연장선으로, 이번 시즌은 본격 수어연극으로 관객을 만난다. 전막을 수어로 진행하는 이번 공연은 농인 배우와 청인 배우가 함께 무대에 서고, 수어와 음성언어가 공존하는 방식으로 작품을 재구성한다. 나아가 단순히 수어를 4추가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농문화를 작품 내적으로 반영해 새로운 예술적 경험을 제시한다.
주민들이 만들어 놓은 엄격한 규칙 덕분에 먼지 하나 없는 ‘깨끗한 동네 1위’에 오른 ‘병목안’, 그 완전무결한 마을에 11살 영지가 등장한다.
영지는 “풍경화니까 강 같은 것을 그려보세요.”라는 선생의 말에 “저는 제가 그리고 싶은 거 그리는데요.”라고 답하며 양배추를 잔뜩 그리거나, 놀이터에서 버려진 라이터를 줍고 다니는 등 어른들의 기준과 통제에 따르지 않는다. 대신 어른들의 통제와 배척이 일상이 된 병목안에서 스스로 ‘마녀’가 되거나 ‘악마 선생’을 소환하며 혼자만의 세계를 펼친다.
자신만의 방식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영지의 상상 속에 어느 날 악마 선생이 찾아온다. 새로운 세계로 가기 위한 조건으로 ‘이야기’를 만들 것을 제안하고, 영지는 밤낮으로 남의 집을 기웃거리며 보고 느낀 것들로 자신만의 이야기를 만든다.
작품은 영지가 만든 이야기를 통해 완벽해 보였던 병목안에 감춰진 균열을 드러내고, 동시에 영지로 인해 점차 변화하는 아이들의 모습을 담아낸다. 어른들은 영지를 ‘이상한 아이’라 부르며 마을 아이들에게 나쁜 영향을 미칠 것을 걱정하는 사이, 점차 자신만의 목소리를 찾아가는 아이들의 성장 과정이 현실과 환상을 넘나들며 펼쳐진다.
<영지>는 완벽함과 정상을 강요하는 사회에 순응하기보다, 자신만의 상상력으로 세상을 재해석하고 균열을 내는 ‘영지’를 통해 동시대 청소년들의 자아를 비추며 우리 시대의 ‘정상성’에 대해 질문한다.
지난 공연의 접근성 시도 과정에서 “영지가 수어를 쓰는 인물이라면?”이라는 상상에서 출발해 본격 수어연극으로 확장된 이번 공연은 판소리 등 음악적 요소를 더해 감각의 밀도를 한층 더 끌어올린다.
초연부터<영지>를 개발해 온 허선혜 작가와 김미란 연출을 비롯한 주요 창작진이 다시 한번 의기 투합해 더욱 감각적인 무대로 관객을 만난다. 수어가 명확하게 전달될 수 있도록 무대와 의상 컬러 등을 재설계하고, 이번 시즌의 ‘영지’만을 위한 오브제를 비롯해 전반적인 무대미술을 새롭게 구성한다.
여기에 수어예술감독 이미선이 새롭게 참여해 작품 전반에 농문화를 반영한다. 일부 대사는 축소하고, 놀이와 오브제를 중심으로 장면을 재구성한다. 작품 특유의 시적인 대사는 수어와 움직임으로 번역되며, 수어문학의 한 형식인 비주얼 버네큘러(Visual Vernacular)를 활용해 몸짓, 표정, 마임, 영상 등 시각적 요소로 서사를 구축한다. 이미선 수어예술감독은 “수어연극의 낯섦이 새로운 몰입을 열고, 공연을 본 이후에도 깊은 여운으로 남기를 바란다”라고 전했다. 이어 “이번 <영지>는 서로 다른 언어와 감각이 만나, 하나의 이야기를 완성해가는 과정”이라고 설명했다.
주인공 영지 역에 <우리 읍내> <맥베스> 등에서 활약해 온 농인 배우 박지영이 캐스팅됐다. 병목안의 마스코트 효정 역에는 드라마 <우리들의 블루스>로 알려진 농인 배우 이소별이 출연하고, 모범생 소희 역에 농인 배우로 꾸준히 활동하고 있는 금예지가 함께한다. 악마 선생 역에는 농인 배우 양지은, 우지양과 초연부터 함께 한 청인 배우 하재성이 출연한다. 또한 이날치 출신의 소리꾼 신유진이 참여해 음악과 음성 해설의 역할을 맡는다.
수어와 음악이 결합된 이번 <영지>는 다양성과 포용의 가치를 무대 위에 구현하며, 장애를 하나의 문화적 정체성으로 바라보는 새로운 시선을 제시한다. 특히 정체성을 형성해가는 청소년 관객에게 ‘다름’을 존중의 가치로 체험하게 하는 계기가 될 것으로 기대된다. 김미란 연출은 “<영지>는 배우가 바뀔 때마다 작품도 새롭게 달라지는 것이 매력”이라며 “이번 시즌의 ‘영지’는 수어를 사용하는, 마치 다른 세계에서 온 듯한 완전히 새로운 캐릭터로 기존 관객은 물론 청인 관객에게도 강한 인상을 남길 것”이라고 밝혔다.
정형화된 마을의 이방인 영지가 어른들의 세계를 깨고 성장하는 과정을 통해, 관객들은 각자의 내면에 자리한 나만의 ‘영지’를 마주하며 위로와 해방감을 경험하게 될 것이다.
공연은 4월 30일부터 5월 10일까지 모두예술극장에서 진행된다.
※ 12살 프로젝트 : 10대 초반 청소년을 특별히 조명하고자 기획된 프로젝트로 <영지>와 <발가락 육상천재>가 있다.
※ 비주얼 버네큘러(Visual Vernacular) : 수어에 기원했으나 고유의 문법을 넘어 몸의 움직임, 제스처, 표정 및 영화적 연출 기법(클로즈업, 슬로우 모션 등)으로 서사를 전달하는 농인(聾人) 고유의 시각 예술이다.
특정 언어를 사용하지 않고도 직관적으로 이해할 수 있어 ‘농인을 위한 음악’이자 청인과 농인이 경계 없이 함께 즐길 수 있는 보편적 예술 형식으로 평가된다.
참조: https://www.inklusives-arbeitsleben.lwl.org/visual-vernacular_interview_eyk-kauly/
참조: 베르나르 브래그(Bernard Bragg) 제안 및 농문화(Deaf Studies) 시각 스토리텔링 연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