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 그 자체가 된 김향안의 삶, 뮤지컬 <라흐 헤스트> 리뷰

뮤지컬 <라흐 헤스트> 프레스콜 사진

김향안이라는 이름의 사람을 알고 있는가? 아니면 변동림이라는 이름의 사람은 알고 있는가? 어느 한 이름은 들어봤을 수도 있고, 혹은 어느 이름도 들어보지 못했을 수도 있다. 그렇다면 김환기와 이상은 들어본 적 있는가? 이번에는 이름을 듣자마자 안다, 고 대답할 수 있는 사람이 꽤 많을 것이다. 김향안과 변동림은 각각 김환기, 이상과 결혼한 이의 이름이다. 그리고 또 한 가지. 김향안과 변동림은 동일 인물이다.

변동림, 그리고 김향안이라는 이름으로 산 여성의 삶을 조명한 뮤지컬 <라흐 헤스트>가 지난 3월 25일부터 서울 종로구 예스24스테이지 1관에서 공연 중이다. 작가와 작곡가가 김향안에 관한 극을 만들어보자고 의기투합하여 시작된 <라흐 헤스트>는 2019년 CJ문화재단 스테이지업 최종 지원작으로 선정된 후, 2022년 제작사 홍컴퍼니의 프로듀싱을 통해 초연되었다. 110분이라는 러닝타임을 듬뿍 채운 탄탄한 서사와 현악기가 더해진 아름다운 선율의 음악으로 호평받은 이 작품은 제7회 한국뮤지컬어워즈 대상 노미네이트, 제8회 한국뮤지컬어워즈 3개 부문(작품상(400석 미만), 극본상, 음악상(작곡))을 수상하기도 했다.

“사람은 가고 예술은 남다(Les gens partent mais l’art reste)”라는 김향안이 남긴 말에서 영감을 받아 <라흐 헤스트>라는 제목을 얻은 이 극은, 김향안이 죽기 전 자신의 수첩을 통해 생을 돌아보며 시작한다. 수첩을 읽어 내려감과 동시에 변동림이 등장하고, 김향안의 시간은 거꾸로 흘러간다. 극에서는 김향안과 변동림이라는 두 개의 이름처럼 서로 다른 배우가 역할을 맡아 연기한다. 또한 그 이름들로 불리던 두 시간대의 장면을 나열하되, 각각 순방향과 역순으로 진행해 마지막이 되어서야 두 인물을 연결 짓는 독특한 구조로 구성했다. 이를 통해 에필로그에 다다랐을 때 관객의 감동을 배가시킨다.

필자 또한 <라흐 헤스트>를 보기 전까지는 김향안에 대해 전혀 모르고 있었다. 하지만, 이 극을 통해 두 천재의 아내보다 천재의 예술에 날개를 달아줬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그의 노력과 성정에 크게 감명받았다. 먼저 김환기-김향안 부부의 프랑스행은 자신의 예술이 어느 위치에 있는지 답답해하는 김환기에게 김향안이 먼저 제안한 것이었는데, 이 부분이 ‘파리에 가면’이라는 극 중 넘버로 잘 표현되었다. “자다가도 그림을 생각하고, 다 그려진 그림을 보며 또 생각하고, 또 생각하고…” 그림밖에 모르는 김환기에게 김향안은 ‘떠나자. 모험해 봐야지.’라고 말하며 프랑스로 먼저 간다. 실제로 김향안은 바로 프랑스로 날아가 프랑스어와 미술사를 공부하고, 아뜰리에를 마련하고 갤러리를 섭외하는 등 김환기가 그림에만 전념할 수 있는 환경을 완벽하게 준비해 놓았다고 한다. 김환기 예술세계를 대표하는 전면점화가 완성된 뉴욕시대도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라는 넘버로 표현되어 있다. 김환기의 대표작과 동일한 제목인 만큼, 환기미술관의 적극적인 협조를 통해 해당 작품이 무대 영상으로 활용되었다. ‘눈 감으면 선명해지는 세상’이라는 구절과 함께 무대를 가득 메우는 김환기의 작품은 객석을 압도시키기에 충분했다. 또한 변동림이 28살 때 김환기와 함께하기 위해 그의 아호였던 ‘향안’으로 개명하였는데, 이 부분 또한 ‘향안, 그 이름을 내게 줘요’라는 낭만적인 장면으로 묘사되었다.

이처럼 사실을 바탕으로 쉽고 흥미진진하게 각 장면이 연출되어 있어, 감상하기 편한 작품이었다. 이와 동시에 김향안이라는 인물뿐 아니라, 이 극을 보는 ‘나’에게 전하는 메시지 또한 놓치지 않은 점이 인상적이었다. 극 중 변동림과 김향안은 대화를 통해 고민과 생각을 나누는데, 전반부에서는 이상의 프러포즈를 받은 변동림이 “아직 느낌표는 아니야” 라며 망설이지만 김향안의 지지와 응원으로 용기를 얻는다. 후반부에는 반대로 김환기와의 인연을 이어갈지 고민하던 김향안을 변동림이 단단하게 안아준다. 결국 내 인생의 모든 것을 감내하고 이겨내는 것, 위로하고 응원하는 것은 오직 나만이 할 수 있다는 메시지를 전해준다. 동시에 당신의 선택이라면 어느 것도 틀리지 않았다는, ‘네 느낌표를 믿어!’라는 변동림의 간결하고 씩씩한 격려 또한 번져나가는 물감처럼 필자의 마음을 따뜻하게 물들였다.

현재 세 번째 시즌을 공연 중인 뮤지컬 <라흐 헤스트>는 참여하고 있는 배우들도 쟁쟁하다. 초연부터 극의 기틀을 닦고, 인물 그 자체로 분했다는 찬사를 받는 향안 역의 이지숙, 환기 역의 박영수, 동림 역 김주연, 이상 역의 임진섭을 필두로, 재연부터 참여하여 뮤지컬 <라흐 헤스트>의 완성도를 더욱 끌어올린 향안 역의 최수진, 환기 역의 김종구, 윤석원, 동림 역의 김이후가 열연 중이다. 이들과 더불어 이번 시즌에 처음 참여해 신선한 활기를 더하고 있는 향안 역의 김려원, 동림 역의 홍지희, 이상 역의 변희상, 최재웅 또한 좋은 평가를 받고 있다.

‘사람은 가지만 예술은 남는다’는 말처럼, 뮤지컬 <라흐 헤스트>를 통해 우리의 삶에 향기를 불어넣을 수 있는 여유를 가져보는 것은 어떨까. 뮤지컬을 관람하고 환기미술관에 방문해 보는 코스 또한 추천한다. 예술 작품이 주는 감동에 흠뻑 빠질 기회가 될 것이다.